시구를 마친 이제혁(29·CJ대한통운)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15년 전이지만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야구선수를 했던 소년 유망주였기에, 마운드 위에서 던지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비록 시구자로 나서 마운드 앞 잔디에서 공을 던져야 했지만, 이내 그는 "초등학교 때의 꿈이 이뤄진 것 같아 정말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이제혁은 지난 21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열린 신한 SOL뱅크 KBO리그 KT 위즈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에 앞서 시구자로 나섰다.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기념해 마련된 이날 행사에 그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패럴림픽 스노보드 동메달리스트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앞서 지난 3월, 이제혁은 대회 스노보드 하지 장애(SB-LL2) 종목에서 3위에 오르며 대한민국 장애인 스노보드 사상 첫 패럴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날 시구는 '2008 베이징 키즈'인 그에게 각별한 의미였다. 당시 야구 대표팀의 올림픽 금메달을 보며 꿈을 키웠던 소년은, 중학교 1학년 시절 불가피한 개인 사정으로 야구공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는 "처음 야구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수많은 팬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면서 뛰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이번 시구로) 내 초등학교 때의 꿈이 이뤄진 것 같아서 정말 행복했다"라고 전했다.
이제혁.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이제혁.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야구 배트를 놓은 뒤에는 아버지 지인의 권유로 스노보드 플레이트를 신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발목 부상으로 장애를 얻는 시련이 찾아왔으나, 2018 평창 패럴림픽을 지켜보며 재기에 성공, 밀라노 무대에서 결실을 봤다. 가장 좋아했지만, 역설적으로 크나큰 시련을 안겨준 두 스포츠에서, 이제혁은 기어코 꿈을 이루고 희망을 얻었다.
패럴림픽 동메달 순간을 돌아본 그는 "'손이 떨린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겪어봤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꿈인가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한국 최초의 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도 기쁘지만, 내가 좋아하는 종목을 계속 타면서 메달까지 땄다는 사실이 더 뿌듯하다"고 강조했다.
21일 수원 KT-KIA전 시구로 나선 이제혁. KT 제공
이제 그의 시선은 4년 뒤 2030 프랑스 알프스 동계패럴림픽으로 향한다. "국가대표 훈련 일정에 맞춰 다음 대회를 준비하겠다"고 다짐한 이제혁은 "이번 메달과 시구를 계기로 더 많은 분이 희망을 얻고 장애인 스포츠에 입문하길 바라며, 향후 패럴림픽에서는 더 많은 한국 선수들과 함께 눈밭을 누비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