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 ➁ 산딸기 콩포트 한 스푼 (1)
박지효 기자
2. 산딸기 콩포트 한 스푼
산책을 나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꺼림이 무색하게도, 일탈이라 여겼던 것을 한 이후에도 정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산책으로 인해 어떤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거라던 여로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다시 학교에 돌아오고 자습실로 발을 옮기면서부터였다. 무채색 풍경에 붉은 노을이 가려지고, 가려졌던 이성도 서서히 깨어나며, 내가 얼마나 미친 짓을 했는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단발성인 산책은 눈 감고 넘어가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산책하자는 제안에 동의했다고? 잘 시간도 부족해서 피로로 쓰러지는 애들이 태반인 마당에?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에 홀린 듯 대답하기 전에, 잡생각 하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라던 선생님들의 말씀을 기억했어야 했다. 하물며 입학 설명회 때 그 교수의 목소리라도.
미래를 원한다면 지금을 희생하세요.
아니,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불가항력적이었던 일이다. 떠올렸다 한들, 그 경고는 아름다운 시간 앞에서 무력했을 터였으므로. 그래, 그땐 어딘가 단단히 홀린 게 틀림없다. 그 붉은 황혼에, 아니면 황혼을 담은 여로의 눈동자에라도.
그것은 확실히 곧 깨어날 꿈이 맞았다. 황혼에서 깨어난 뒤엔 여전히 현실이 있었으니까. 바다를 담은 그 눈이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단지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아주 단순히,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 냉철한 이성을 좀먹어 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은 펜을 들어야 한다는 외침을, 제2 공용어의 문장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는 진리의 외침을 외면하게 했다. 그것은 여로가 오기 전, 내게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균열을 자꾸만 넓혀갔다. 사실은 그 균열의 존재가 정상이었다고 속삭이면서.
…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곤란하다. 이제는 여로가 표면적인 도움이라도 필요하지 않을 시기니까, 조금씩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지나지 않아 깨어질 결심이라는 건,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나서 깨달을 수 있었다.
때는 아무도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진 못했을 오전. 분자생물학 수업 시간이었다. 평소보다 약간 늦게 들어온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채점 결과를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원래도 살가운 편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조금 더 딱딱한 목소리. 학생들의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면 선생님들은 으레 목소리를 굳히곤 했다.
“방금 논술 채점 결과를 메시지로 전송했습니다. 이의 있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채점 오류를 검증할 수 있을 때만 앞으로 나오세요.”
말을 끝낸 선생님은 교탁에 내려둔 투명한 스크린을 몇 번 조작했다. 곧 교실에 앉은 학생들의 창에 저마다 알람 소리가 울리자, 학생들은 긴장한 낯으로 메시지를 클릭했다. 번뜩이는 불빛이 시야를 자극한 건 내 창도 예외는 아니다. 푸른빛이 도는 메시지창을 클릭하자, 선생님이 보낸 점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점수 같은 개인적인 것은 프라이버시 버튼이 있어 나만 볼 수 있게 되어있었다.
지금 확인하는 것은 지난 레포트 형식 보고서의 채점 결과였다. 입시에는 포인트 말고도 과목 점수가 반영된다.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계절 시험과 중간중간 있는 과제였는데, 이 레포트는 꽤 큰 점수가 걸려 있어 상당히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었다.
mRNA에 대한 탐구가 레포트의 주제였는데, 별로 어렵지 않게 레포트를 끝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분자생물학은 꽤 자신 있는 과목이기에, 만점을 받을 것을 상정하며 메시지를 클릭했다.
… 어라.
나는 메시지를 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소리가 성대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애써 삼킨다.
39/40.
최종 점수란에 쓰여 있는 건 만점이 아니었다. 왜지? 오류가 있었나?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무시하며 같이 보내진 내 답안지를 열었다. 아직 이의 제기가 가능하다. 아직까진 괜찮다. 아직까진.
레포트 중간에, 내가 점수를 깎인 부분이 표시되어 있었다. mRNA의 기능에 관한 부분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그 부분을 다시 읽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러나 세 번을 다시 읽어봐도 딱히 틀린 부분은 찾지 못했다. 뭐지. 정말 채점 오류인 건가.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처음 있는 일이기에 더 놀란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순간 미친 듯이 출렁이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류가 없음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 뒤 조용히 손을 들었다. 내게로 시선을 돌린 선생님이 의아한 낯으로 나오라고 손짓하자,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에 위치한 교단으로 나아가는 동안,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A-13 여명입니다. … 세 번째 문단에서 1점이 깎였던데, 아무리 읽어봐도 오류가 없어 어떤 부분에서 감점이 됐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성을 부여잡고 예의 바르게 얘기하려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모른다. 더듬더듬 얘기를 꺼내면서도 확신이 없어 마음속이 긴장으로 꽉 죄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AI의 도움을 받아 채점하므로, 내용상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니까. 서툰 이의 제기에 선생님은 눈앞에 창을 띄워 내 레포트를 열더니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을 확인하고는 아, 하는 탄성을 뱉었다.
“내용에는 오류가 없는데, 문장을 쓰다가 실수를 해서 점수가 깎였습니다. 3문단 세 번째 문장요.”
“네? 실수…요?”
“중간에 mRNA를 MRNA라고 썼더군요. 이러면 뜻이 성립이 되지 않아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실수 안 하는 학생으로 알고 있는데… 제대로 확인을 안 했나요?”
아.
나는 황급히 선생님의 시선을 좇아 그 문단을 다시 바라보았다. 부정하고 싶었으나… … 정말이다. 소문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뻔뻔하게도 대문자가 존재했다.
왜, 왜 그랬지?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됐다. 다른 어려운 내용도 전부 다 오류 없이 썼으면서. 오류 검수를 몇 번이고 했으면서. 왜 저게 보이지 않았지?
“더 문제가 있나요?”
“… 아… 니요. 죄송합니다.”
반쯤 혼이 빠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데, 선생님이 나를 이상한 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거기서 마지막 남은 예의를 끌어모아 겨우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 낸 것이 마지막 이성이었다.
머릿속이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찬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오히려 화도 나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강박적인 질문을 던질 뿐.
왜 보지 못했지. 왜 그렇게 썼지. 왜 고치지 않은거지? 하지만 오탈자가 끝까지 보이지 않았는데. 그럼,
… 내가 거기서 뭘 어떻게 더 할 수 있었지.
그날 한결에게서 읽은 척척한 감정들은 지금 나를 좀먹어 갔다. 무력감. 탈력감. 숨통을 틀어막는 듯한, 후회와 자책감 따위들.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의 자욱이 척척하기 그지없다. 발밑에, 정제되지 않은 서툰 감정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 당장 현실의 문제 자체도 보이지 않는데, 그 겁먹은 것들을 달래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시선들이 느껴졌다. 몇 개의 시선들은 이미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때부터 내 곁에 있었다는 것이, 시선이 낮아지자 더욱 자세히 보였다.
웬일이래, 쟤가?
쟤 저번 학기에 레포트로 우수상도 받았었잖아. 근데 실수는 웬 실수…
야, 애 들어… 어차피 우리한텐 좋은 거잖아. 그냥 조용히 해.
잔뜩 겁먹은 몸이 더욱 작게 웅크려진다. 아무리 소리를 낮춰도, 그 날 것의 감정들이 너무나 선연히 날아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동시에 아무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아니었으므로.
내 절망은 누군가에겐 이득이 된다. 잔인한 구조였지만, 그것으로 이득을 본 이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내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일 뿐, 나도 그렇게 이득을 본 이들 중 하나일 테니까. 그러니까, 저 날아오는 말들을 아파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냥 나아가야 하는 수밖에 없다. 담임 선생님은, 회복 탄력성이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자퇴한 내 룸메이트에게 했던 말처럼, 한 번의 실수가 입시 전체를 좌우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할 일을 하자. 그래. 점수 확인이 끝나면 보통 자습을 주니까, 화학 레포트에 쓸 자료를 찾는 것이다. 이의 제기를 하려는 애들이 한두 명은 더 앞으로 나가고 있으니, 나를 향한 시선도 내가 무시하면 금세 수그러들 것이고,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 머리로는 그랬다.
다만 몸이, 심장이 괜찮지 않다고, 제 주인의 속도 모르고 쿵쿵 울려댔다. 손이 벌벌 떨리는 걸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다. 태블릿에 작성하던 화학 레포트를 띄워 두고는, 획 하나를 겨우 그었다. 온갖 척척한 것들이 좀먹은 가슴을 대변하듯, 그어진 선은 삐뚤빼뚤했다. 뱀이 속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숨이 막혔고, 시야가 흐렸고, 아무 소리도 낼 수가-
톡톡.
숨을 쉬기가 점점 어려워지던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이제 피하자고 다짐했던 눈동자가 보인다. 여로였다.
여로는 내가 한결에게 했듯이 내 이상 상태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천천히, 손으로 제 왼쪽 가슴께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이해하지 못할 행동에 가만히 있자, 여로가 마치 따라 하기를 종용하듯 내 손을 눈짓한다. 한계에 이른 정신은 오히려 아무 의심 없이 그 행동을 받아들였다.
섬유 위로 따뜻한 내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아래, 세찬 고동으로 생명을 알리고 있는 뜨거운 것이 있었다.
두근. 두근. 그 고동에 신경이 쏠렸다. 미약한 듯하면서도 가장 거대한, 신비로운 무언가가 인사를 건넨다.
두근. 두근. 모든 사고가, 생각이, 정제되지 못한 감정들이 맥동 속으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두근, 두근… 하아. 고동이 점차 제 궤도를 되찾고, 짙은 한숨과 함께 탈력감이 느껴졌다. 몸에서 힘이 축 빠져나가고, 나는 거짓말처럼 다시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면, 혹은 어떤 생각에 너무 깊이 잠겨버리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내 심장이 뛰고 있는 내 몸이, 외부의 입력에만 반응할 수 있는 앰프가 되어버린 기분. 지금이 유독 심하긴 했으나 종종 느껴본 적 있는 일이었고, 보통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괜찮았다. 어떤 정당한 것에 대한 몰두는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을 잊게 해주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안정을 찾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몰두는 이따금 폭력적이었지만, 가만히 내 생명의 고동에 집중하는 건 전혀 폭력적이지도, 벅차지도 않았다. 단지 조금 따뜻할 뿐.
내가 안정을 찾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여로가 잠시 몸을 숙이더니 작은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볼펜으로 그 위에 글씨를 휘갈겨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배역에 너무 몰입했잖아.’
펜촉이 움직이며 표면이 약간 거친 흰 종이 위에 유려한 흔적을 남겼다. 푸른 스크린과 태블릿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 흰 종이를 보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다. 글씨가 써지는 광경은 어딘가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다. 손글씨도 오랜만에 보는데, 여로의 필체는 학교에서 주로 쓰는 폰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충 흘려 쓴 것 같지만 어딘가 유려하고, 일종의 아름다움까지 느껴졌다.
그런 양식의 글씨를 필기체라고 한다는 것은, 나중에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횡설수설하는 사이, 여로가 내게 쓰던 볼펜을 내밀었다. 나는 디지털 펜밖에 가진 게 없었고, 그것은 종이 위에 글씨를 남기지는 못했다. 잠시 주춤한 나는 그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이고 손을 움직였다.
‘어제 그 말을 지금 왜 하는 거야? 그냥 잠깐… 놀란 것뿐이야. 점수가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
거친 면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이 퍽 낯설다. 나는 글씨를 최대한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하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글쎄. 과호흡 증상을, 그냥 놀랐다고 표현하진 않지.’
‘과호흡? 그 정돈 아니야. 누가 점수 하나로 과호흡이 와.’
‘그럴 만도 하지 않나. 그만큼 중요하다며.’
나는 순간 놀라 종이에서 눈을 떼고 여로를 바라보았다. 여로가 먼저 점수가 중요하다고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여로의 말은 내가 받아들인 방향과 다른 것이었는지, 그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펜을 다시 움직였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건 아니야. 단지 이해한 것뿐이지. 포인트는 너희가 세계처럼 여기는 거잖아. 거기에 실금이 갔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힐 만도 해.’
‘… 그런가. 그치만 이번 건 그냥, 내가 멍청해서 그랬어. 내 멍청함의 업보를 내가 받는 것뿐이니까,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데, 뭐.’
‘네가 멍청한 게 아니라, 세계가 잘못됐을 수도 있지.’
꽤 냉소적인 말에 간단히 답한 여로는 종이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나는 잠시 눈을 둘 곳을 찾다가, 그냥 마주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계가 잘못됐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세계라고 표현한다면 포인트는 세계가 맞았다. 그만큼 우리를 크게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고, 그만큼 우리의 삶과 행동을 지배했다.
삶을 지배하는 어떤 절대적인 것을, 우리는 틀렸다거나 잘못됐다고 하지 못한다.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나는 포인트가 잘못됐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객관적이고 올바른 방향의 평가가 가능한 방법이 포인트를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일전에 그랬듯 또다시 내 진리를 비틀었다. 여로는 잠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다시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모든 대본이 옳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멍청함의 업보라는 표현은 좋았어. 점점 배역에서 벗어난 대사를 하고 있는 걸?’
‘… 잠시만, 그럼 안 되는 거 아냐?’
배역에서 벗어난 게 왜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지? 나는 도저히 여로의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뛰어들기엔 여전히 난해한 세계였고, 여전히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네 말대로라면, 배역에서 벗어났다는 게…’
나는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려고 첫 마디를 적었다. 그러나 뒤에 이을 말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여로의 체온이 남아있던 볼펜이 내 체온으로 따뜻해질 때까지도 나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모르겠다. 네 말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차라리 네가 설명하려는 것에 대한 이론을 설명해 줘. 그럼 이해해 볼 테니까.’
‘애석하지만 나는 어떤 학문이나 이론 같은 걸로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야. 정의를 내리는 게 불가능하니까, 이론서도 있을 수가 없어.’
여로가 ‘이론’이라고 쓴 내 글씨를 두 줄로 박박 그었다. 심통난 표정으로 엑스 자를 만들고 있는 고양이를 그려 넣은 것은 덤이었다. 기가 차 여로를 바라보는데, 여로는 예의 그 여유로운 웃음으로 볼펜을 움직였다.
‘이해하고 싶다면 책을 한 권 읽어봐. 단, 논문이나 과학 이론서는 안 돼. 이 백 년 이상 된, 네 배역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걸로.’
‘책? … 네 전제 조건에 맞는 서적은 문학밖에 없는데.’
지금 사회에서는 문학이란 게 거의 출간되지 않는다. 사회인들 보편적으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학이었다. 어제 생뚱맞게 문학 얘기를 꺼낸 걸 떠올리고 나니, 문학을 염두에 두고 얘기했음이 확실한 듯했다.
‘맞아. 너는 은유라거나, 직유라거나, 어떤 문학적 수사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것 같거든.’
‘비효율적이니까. 바로 말할 수 있는 걸 빙빙 돌려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물론 효율적이라곤 할 수 없겠지. 옛날엔 문학도 효율적이었던 시절이 있었어. 학문이었던 적이 있었고, 효율적으로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정의나 개념 같은 것들이 쓰였지. 네가 말한 것처럼, 문학에 대한 어떤 이론서도 있었어. 하지만 그게 문학 자체의 본질은 아니야. 문학은 효율적일 수 없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라기보단 어떤 형이상적인 무언가거든.’
여로는 한 자, 한 자를 미려하게 흘려 썼다. 글에 불과한데도, 곡선들의 움직임이 여로가 이 대목에서는 어떤 목소리로 얘기했을지 상상할 수 있게 했다. 딱딱한 고딕체가 아닌 글자에는 힘이 있다. 음성들을 살아나게 하는….
그 의미들을 한창 좇아가고 있는데, 별안간 종이 쳤다. 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무려 한 교시를 내내, 여로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기만 한 것이다.
“무조건 읽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내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고 싶다면, 하나쯤은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한 교시를 아예 날려버렸다는 충격도 잠시, 여로의 목소리가 멍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던 내게 겹쳤다. 읽고 있던 종이책을 덮어 내게 내밀면서, 여로는 옅게 웃었다.
“요즘엔 문학책 구하기가 힘들더라고. 선물이니 받아줄래? 나름대로 소중한 책인데, 그만큼 너한테 선물할 가치도 있거든.”
“… 소중한 거라고? 이걸 왜 나한테 줘?”
여로가 내민 책은 겉표지가 단단한 양장본이었다. 끄트머리가 약간 닳아, 읽은 흔적이 조금 남아있는. 감성이라곤 죄 메마른 심장으로도, 그것이 새것이 아니기에 더욱 특별하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종이책은 흔하지 않기도 했고.
지금 배우는 지식은 파멸 이후에 정립되어 디지털 정보의 형태로 존재했다. 물론 그것도 파멸 이전의 지식을 토대로 삼아 발전한 것이기에 이전의 학문도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모두 디지털 문서화를 거친 후에야 사용할 수 있었다. 온전히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지만, 가뜩이나 환경 문제가 심각했던 지구에서, 굳이 종이로 출판해서 사용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심지어 인류의 뇌는 아예 파멸 이후 디지털 자료를 유용하게 이용하도록 발달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오래된 논문이라 하더라도 종이책으로 볼 상황은 거의 없다는 소리였다.
“응. 설령 네가 이해하지 않는다 한들…, 적응하지 않는 법을 택하지 못한들, 넌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내 말을 들어준 사람이거든. 소중한 것 하나쯤은 선물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어.”
여로에게 소중했을 책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여로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기억 나는 순간이 올 거야. 주어가 빠진 문장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이것저것 도와준 게 고맙다는 뜻인 걸까. 여로의 입에서는 아무리 간단한 감정이나 말도 어떤 사고를 거쳐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갑작스런 선물이 얼떨떨하기도 했고, 해준 것에 비해 선물의 깊이가 너무 깊어 고맙다는 말이 바로 튀어나오질 못했다.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여로가 선생님이 불렀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전학 시기가 레포트 준비 기간보다 살짝 늦은 탓에, 여로는 레포트를 내지 못했다고 들었다.
여로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멍을 때렸다. 고작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심장이 추락했다가 다시 궤도를 찾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그 이면엔 항상 여로가 있었다. 나는 이제 부정하기보다, 그냥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 심연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왜 여로의 손길은, 평소 내 세계와는 달리 매번 다정할 수 있는지… 부정하려 했으나 부정되지 않는 것들도 있음을, 세계에 금이 가고 나서야 깨달아 버린 것이다.
여로가 남기고 간 책의 표지를 쓸었다. 팔랑팔랑 한 장이 넘어가는 감각이 생경했다. 디지털 교과서처럼 매끄럽다기보단 표면이 약간 거칠다. 묵직하고, 약간 오래된 향기가 나고, 장이 넘겨질 때마다 다음 장이 손에 걸쳐져 이상한 잔흔을 남겼다.
하지만 그 투박함 속에는 모종의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퍽 낯설면서도, 이해할 수 없이 매혹적인 것….
나는 책을 소중히 집어 들었다. 종이 한 장 정도 분량의, 여로와의 필담이 담긴 종이를 책 사이에 고이 끼워 넣으면서.
나는 필담이 적힌 그 종이를 꽤 오래 간직했다.
이해할 수 있을지, 중간에 낙담해 버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 종이는 왠지 눈앞에 떠오른 스크린보다 훨씬 인간다워서. 주워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는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➁ 산딸기 콩포트 한 스푼 (2)에서 계속)
박지효 기자 jihyop@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