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일본 도쿄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난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은 새하얀 자켓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당시 기자는 한국 야구의 경기력 부진, 일본 선수들의 기량 발전에 대해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첫 대상자가 ‘일본 야구의 전설’ 장훈이었다.
일본프로야구(NPB) 통산 최다 안타(3085개) 기록자인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평론을 하며 '독설가'로 활동했다. 또한 한국 국적을 유지하다 2024년 귀화한 그는 9일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6세. 한국 언론과 마지막 인터뷰에서 나눈 얘기를 남긴다.
특유의 광곽 타법으로 일본 프로야구를 뒤흔든 장훈. IS 포토 고교 시절 그는 한·일 친선 고교야구 출전을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전국을 돌며 경기를 했는데 한 경기만 비겼고, 열 경기 이상을 일본이 이겼다.
“공항에서부터 한국인들이 ‘조선의 아들이 왔다’라며 환대했습니다. 경기장에서는 ‘아리랑’, ‘도라지’ 같은 노래를 응원가로 불러줬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자주 부르셔서 귀에 익은 노래였죠. 그걸 듣고 눈물을 흘렸어요. 너무나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게 민족의식이구나 싶었죠. 또 한국에서 먹은 음식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일본에서도 한식을 먹긴 했는데, 그거보다 몇 배 맛있었죠. 허허.”
그는 1958년 11월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닛폰햄 파이터스)에 계약금 200만 엔을 받고 입단했다. 당시 가치로는 어머니를 더는 고생시키지 않아도 될 거금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도에이 구단주는 장훈을 자신의 양자로 들이겠다고 했다. 한국 국적을 버리고 일본인이 되라는 뜻이었다.
그때 일본 프로야구는 외국인 선수를 팀당 2명밖에 기용할 수 없었다. 19세 소년이 힘 좋은 외국인 선수와 경쟁하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장훈의 어머니는 “조국을 버리려는 거냐? 그럴 거면 당장 야구를 그만두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결국 구단주가 나서 ‘일본에서 출생한 선수는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관철해냈다. 장훈 덕분에 이후 재일동포 선수들이 귀화하지 않고도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할 길이 열린 셈이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장훈룰’이다.
장훈은 22시즌 동안 일본 프로야구를 강타했다. 1959년 신인왕, 62년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타격왕을 7회(1961, 1967~1970, 1972, 1974년)나 차지하면서 통산 3085안타를 터뜨렸다. 이는 아직까지도 일본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굽어 있는 장훈의 오른손은 온전히 힘을 쓰지 못했다. 치명적인 약점을 그는 특유의 광곽타법(廣角打法, 타구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라운드 전체로 보내는 기술)으로 극복했다. 신기에 가까운 이 타법은 재능과 노력이 더해진 결과라고 그는 믿었다.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릴 일이죠. 좋은 체격과 빠른 스피드를 물려주셨잖아요. 전 노력으로 나머지를 채웠을 뿐입니다. 경기를 마치고 매일 300번씩 스윙 훈련을 했죠. 2시간씩 걸리는 일을 하루도 쉬지 않았어요. (안타를 치지 못하면) 잠을 자다 깨서 방망이를 휘둘렀거든요. 그래서 선수 시절에는 가족과 잠도 따로 잤습니다.”
홀어머니를 호강시켜주겠다는 장훈의 꿈은 프로 입단과 함께 이뤄졌다. 그렇다고 전쟁 같은 그의 삶에 평화가 온 건 아니었다. 더 잘하고, 더 성공하고 싶었다. 그가 활약한 1960~70년대는 일본 프로야구의 황금기였다. 오 사다하루가 868홈런(세계기록)을 터뜨렸고, 재일동포 선배이자 일본 최다승(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1933~2019)가 활약했다. 장훈의 꿈은 이들을 이기는 게 아니었을까.
일본 프로야구 시절 백인천(왼쪽)과 장훈(오른쪽). 2026년 모두 고인이 되었다. IS 포토 “아닙니다. 프로 선수가 되고 나서는 저 자신을 이기는 게 꿈이었어요.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이기는 것이죠. 동갑내기 오와는 좋은 친구예요. 얼마 전까지 가네다 선배와 셋이 가끔 만났습니다. 오는 대만계니까 일본 프로야구 주요 기록은 우리가 다 가지고 있다면서 서로 웃었죠.”
장훈의 어머니는 야구장을 찾을 때 여보란 듯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조선 옷을 입으면 차별 받았던 시절에 자신의 조국을 당당히 드러냈다. 1980년 장훈이 통산 3000안타라는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운 경기에서도 그랬다. 일본 선수 누구도 근접하지 못한 고지를 ‘한국의 아들’이 정복하는 장면을, 어머니는 저고리를 입고 지켜봤다. 장훈은 그게 ‘민족심(民族心)’이라고 말했다. <계속>